Story(문화,여행)

여행) 단양, 충주호(청풍호)와 배론성지

opal* 2017. 10. 30. 21:00

청포도 모임 2017 가을여행.

시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마지막 월요일,

월 초 추석 포함 열흘이나 되는 긴 연휴 끝난 후 12일 만나 화담숲 갔다가

 "단풍이 덜 들었으니 단풍 다 떨어지기 전 시월에 다시 한 번 만나 여행 다녀오자' 고 한 날이 오늘 이다.       

 

해 길이가 짧아져 첫 약속장소 나가도록 어둡다. 서울역앞에 가니 관광버스들이 남대문 앞까지 줄지어 가을 성수기임을 나타낸다. 

잠실을 마지막으로 승객 다 태운 후 여행사에서 아침식사로 제공하는 윤기 흐르는 찰밥은 반찬 없이 먹어도 맛있다.

 

도담삼봉 주차장 도착하여 석문부터 찾는다.

 

석문에 대한 설명이 안내판에 쓰여있다. 

 

처음부터 계단을 가파르게 올라가려니 "오르기도 힘들지만 내려올 땐 더 힘들다'며 서너 명은 석문 보러 가기를 아예 포기한다.  

 

도담삼봉에서 북쪽 언덕 위에 있는 이향정을 지나 나무계단을 계속 오르면 흙길이 잠시, 다시 나무계단을 내려 딛으면 석문 전망대가 있다.  

 

단양팔경인 석문과 도담삼봉은 70년대 후반인지 80년대 초인지 첫 방문이 있었다.   그 때는 강에서 배를 타고 석문을 보기도 했다. 

단양팔경 중 일곱 곳은 몇 번씩 다시 가보기도 했지만 석문 한 곳만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단양 팔경 중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은 길가 계곡에 물과 함께 하고, 사선암은 계곡물 옆으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구담봉이나 옥순봉은 유람선 타고 강에서 바라보거나 봉우리 정상엘 오를 수 있다. 

옥순봉(玉筍峯)은 단양팔경 중 유일하게 단양에 소재하지 않고 제천시 수산면에 속한다.

 

단양 석문(丹陽 石門)은 도담삼봉에서 남한강 상류 약 200m 지점에 위치, (매포읍 하괴리, 2008.9.9. 명승 제45호 지정)

 

단양팔경 중 하나인 석문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 낸 자연유산으로 오랜 세월동안 풍화되어 동굴이 붕괴되고
남은 동굴 천장의 일부가 마치 구름다리처럼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문 자체의 형태도 특이하고 아름답다.
천연적으로 형성된 너비 15∼20m에 달하는 거대한 석문으로 산 위에 걸쳐 있어 훌륭한 경관을 이룬다.

 

석문을 통해 바라보는 남한강과 건너편 농가의 전경이 마치 사진 프레임을 보는 듯 아름답다.

 

 

전망대에서 나와 촬영 위치를 조금 높여보니 나무가 강물을 가린다. 

 

석문 아치를 보니 3년전 (2014.5) 미국 그랜드캐년 트레킹 때 아치스 공원, 데빌스 가든(Devils Garden)에서 본 아치들 생각이 난다.

그곳에 있는 아치들은 나무가 없으나 이곳 석문 아치에는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어 신기하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들이 신기하여 올라가 보고 싶기도하다.  

 

친구들 몇은 계단조차 아예 안올라오고, 몇 명은 계단 오르다 힘들다며 도중에 포기하고 되돌아가 낯선이에게 부탁하여 휴대폰으로 한 컷.

 

석문을 통해 바라보는 마을이 액자 속 그림 같아 더 아름답고, 고향의 봄 같은 느낌이 든다. 

 

석문 촬영 마치고 나무 계단을 다시 올라 주차장으로.

 

석문 쪽 언덕에서 내려다본 도담삼봉. 예전엔 안보이던 도로가 생겨 풍광이 달라졌다.

단양 팔경은 남한강 상류에 있는 떠있는 도담삼봉, 무지개 모양의 석문, 죽순 모양의 옥순봉, 거북 모양의 구담봉,
선암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사인암 등을 말한다.  

 

단양 도담 삼봉(丹陽 島潭三峰)은 남한강 상류에 3개의 기암(奇岩)이 물 위로 보이는 바위섬 이다.  

 

카르스트(karst) 지형이 만들어낸 원추 모양의 봉우리로 남한강이 휘돌아 이룬 깊은 물에 풍채가 돋보이는
 장군봉(남편봉)을 중심으로 아담한 모양의 첩봉(아들)과 처봉(딸) 등 세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이들 봉우리는 그 형상이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남한강과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보여주고 있다. 
장군봉에는 ‘삼도정’이라 불리는 육각 정자가 있어 운치를 더하는데 북쪽에선 볼 땐 정자가 안보이고 지붕만 살짝 보인다.
도담삼봉은 충주 댐의 완공으로 약 1/3이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근래에는 수량이 줄어 바위가 더 들어나 보인다.

 

이향정에서 도담삼봉을 배경으로.

 

단양팔경 중 제1경으로 손꼽히는 도담삼봉은 일찍이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鄭道傳)의 유년시절을 함께 한 곳 이기도 하다.

 

삼봉(三峰)은 본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 왔으며, 그 후 정선에서는 매년 부당하게 단양에 세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어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도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시오.” 라고
정선군 사또에게 항의를 한 후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정도전은 호를 ‘삼봉’이라고 지을 정도로 도담삼봉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청풍나루 가는 길에 잠시 들린 금월봉, 이곳은 도로 바로 옆에 있어 이쪽 지역 산행시 자주 들리던 곳이다.

 

 

 

 

 

 

금월봉에서 청풍나루 가는 도중 정보쎈터 근처에서 우럼쌈밥 점심 식사.

 

예전엔 충주댐 옆 충주나루에서 유람선을 탄 적이 있었으나 오늘은 청풍나루에서 승선한다.

충주댐을 만들며 충주호로 불리던 것이 제천 지역에선 청풍호라 불린다. 제비봉 아래 장회나루 선착찯엔 여러번 간적이 있다.

 

 

멀리 동산과 작은 동산이 보인다. 청풍대교 가까이 있는 작은동산은 꼭대기에서 청풍나루 주변과 비봉산이 가장 잘 보이는 산이다. 

 

청풍나루에서 바라본 청풍대교.

전에는 구 다리 건너 수몰지구에서 가져온 건물로 지은 청풍문화재 단지를 둘러 보기도 했었다.

 

청풍나루 건너편으로 보이는 모습.

 

 

 

 

청풍나루 건너로 보이는 숙박 시설과 번지점프대 모습. 작은 동산에 오르면 저 시설들도  다 조망된다.

 

장회나루를 떠난, 우리가 탈 배가  청풍나루로 들어오고 있다.

작년 봄 산행(2016.04.26) 했던 작은 동산 바위에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던 생각이 잠시 떠오른다.

 

우리가 탈 청풍호 유람선.

 

유람선에 승선하니 친구들은 춥다고 2층 객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혼자 3층 갑판에 올랐다.

섬여행 시에도 여간해서 선실엔 안들어가고 주로 갑판에 서서 다닌 버릇이 있다.

우리가 가는 코스는 청풍나루에서 장회나루까지의 왕복, 양쪽으로의 풍광이 좋다.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기도 했지만, 3층 갑판에 부는 바람은 더 차나 방한복을 준비하여 무방하다.    

 

 

장회나루를 향해 달리는 유람선은 청풍대교 아래를 지난다. 

 

여객선이 아닌 우람선이라 3층 갑판에도 의자를 많이 준비해 두었다.

1층에는 아직도 가무를 즐기는 시설이 있어 시끄럽다.

 

 

청풍호에서 양쪽 봉우리 사이로 보이는 월악산.  월악산 정상에서 충주호 배경으로 사진 찍히던 일이 생각난다.

 

국립공원 월악산(1094m)을 줌으로 당겨 보았다. 월악산은 몇 번의 산행이 있었다.

월악산 남쪽 능선으로 경상북도와 잇닿아 있으며, 북서쪽 능선은 충주호와 접해 있다.

호수 주변으로 보이는 봉우리들이 산행했던 곳이 많을텐데 어느산인지 구별이 어렵다. 

 

청풍호에서 바라본 금수산(錦繡山, 1,015m), 8년 전 가을(2009.11.10) 산행한 적이 한 번 있다.

금수산은 원래 백암산(白岩山)이라 하던 것을 퇴계 이황(李滉)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산이 아름다운 것을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다”고 하며 금수산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금수산은 월악산국립공원 북단에 위치하며 주봉(主峰)은 암봉(巖峰)으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산능선이 마치 미녀가 누워 있는 모습 같다는 미녀봉, 신선봉 등이 있다. 
단양읍 북쪽으로 38km 떨어진 소백산 줄기인 국망봉(國望峰:1,421m)·연화봉(蓮花峰:1,394m)·도솔봉(兜率峰:1,314m) 등이 조망된다. 
강건너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은 전에 복숭아 꽃이 많다하여 도화리로 불린다고 한다.

 

차타고 지나다닐 땐 못보던 집들이 멀리 호수에서 보니 산 기슭의 많은 주택들이 잘 보인다. 

 

 

모자 날아갈까봐 스카프를 둘렀더니 바람에 정신없이 날린다. 맨아랫층 뱃머리 깃발아래서  옥순대교 배경.

 

청풍호에서 바라본 옥순대교 주변의 산들은 산과 호수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봉우리들이다.  

 

위 사진 좌측 옥순대교 북단에서는 가은산이나 둥지봉, 말목산 산행 할 수 있고, 옥순대교 남단(우측) 옆으로는 옥순봉이 솟아있다.

 

둥지봉이나 가은산 산행할 땐 충주호 유람선에서 안내하는 멘트가 산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울린다. 

 

단양팔경 중 한 곳인 옥순봉(玉筍峰. 286m)은 행정구역은 제천시 수산면에 속한다.

 

제비봉과 구담봉을 연계하여 산행하기도 했지만, 구담봉과 옥순봉을 연계하여 산행 한 적이 두 번 있다. 

 

단양 팔경 중 한 곳인 구담봉(335m).

 

 

 

구담봉(335m)

 

구담봉 정상이 있는 봉우리.

 

제비봉 장회나루.

단양 제비봉(721m)은 충주호를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라 여러번 산행했던 산이다.

 

 

장히나루까지 1구간만 승선한 사람들은 장회나루에서 내리고 우리는 청풍나루로 되돌아가게 된다.

 

 

 

 

충주호(청풍호) 유람 끝낸 후 예쁜 단풍을 보기 위해 배론성지로 이동.

 

배론성지(舟論聖地)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鳳陽邑) 구학리(九鶴里)에 있는 가톨릭 성지 이다.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재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에서 소유, 관리한다. ‘

 

배론’은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주교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이 머무르며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과 최양업(崔良業:1821∼1861) 신부의 묘가 있으며,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주문모(周文謨)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천주교도가 구학리 배론 산골에 숨어살았다.


황사영도 배론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조선교회의 박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써서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에게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가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었다. 이 배론의 토굴에서 쓴 밀서를 황사영백서라고 한다.

 

1856년(철종 7)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이곳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를 양성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신부들이 처형당하고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조선 천주교사상 두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도 이곳에서 1861년 순교하였는데 뒷산에 그의 묘가 있다.

배론은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다.


천주교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1801년에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이 〈백서(帛書)〉를 작성하였고, 1855년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된 곳이다.
옛 지명은 팔송정 도점촌(陶店村)이다.

배론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이들은 주로 옹기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인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은 김한빈(金漢彬, 베드로)과 함께 그해 2월말에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이때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신자 김귀동(金貴同)이 이들에게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은신처로 마련해 주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실과 김한빈, 황심(黃沁, 토마스) 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백서의 전달자가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체포되어 그의 자백으로 황심이 체포되고 이어 황사영, 김한빈, 집주인 김귀동 등도 체포되었다. 이와 관련된 신자가 모두 체포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그후 1840년대 수원 출신의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박해를 피해 다니다가 1843년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1855년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J.A.메스트르 신부가 이곳에 ‘성 요셉 신학교’을 설립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안에서 최초로 격식을 갖춘 신학교로 3명의 첫 입학생들이 장주기에게 한문을 배웠고,

이듬해 푸르티에(Pourthie)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864년 말 처음으로 서품식을 갖고 2명에게 삭발례와 소품을 주었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사목 방문 도중에 가끔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였으나

1861년 과로와 장티푸스로 문경의 한 교우촌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초 푸르티에 신부의 주관 아래 배론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장주기를 체포한데 이어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이들이 모두 순교하자 배론 신학교도 폐쇄되었다.
이들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자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박해가 끝나면서 재건되어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1942년 12월에 공소 신자들이 최양업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그 묘비를 만들어 해방 후에 제막식을 가졌다.

1976년 7월 원주교구에서는 ‘배론 성지 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성지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성지이기도 하지만 단풍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