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寫眞

예산 덕숭산(495m)

opal* 2018. 3. 4. 21:30

 

2년 만에 다시 찾는 덕숭산(495m).

2년 전(2016.02.23) 산행 들머리는 수덕고개, 이번엔 거리가 좀 먼 들판 둔리에서 산행을 시작 한다. 

 

북쪽으로는 가야산, 남쪽으로는 용봉산이 위치하며, 수덕사를 품고 있는 덕숭산은 오늘이 두 번째 산행이다.

 

덕숭산(德崇山, 495m)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德山面)에 위치한다.

차령산맥 줄기로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있다.
믾이 높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부터 호서(湖西)의 금강산이라 불려 왔다.
1973년 3월 덕숭산과 인근 가야산(伽倻山:678m) 일대가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수덕사를 비롯하여 정혜사, 만공탑, 여승당, 보덕사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충의사와 덕산온천 등 명소가 있다.

 

둔리에서 시작하여 수덕사 주차장에서 끝나는 등산 코스를 빨간별()로 표시해 보았다.

 

서해안 고속도로 행담도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다시 출발하여 수덕사 주차장 도착.

 

잠 나설 때 비가 내려 걱정했는데 주차장 도착하니 비는 멎었다. 예보상으론 저녁에 비가 내린다고 했었다.

산행 중에도 비가 내리면 좋지 않지만 산약회의 큰 행사인 시산제가 있는 날이라 더 걱정을 했던 것이다. 

 

주차장 도착하니 다른 팀 버스도 여러 대 와 있고 각각 버스 옆에서 시산제가 거행되고 있다. 

본인이 다니고 있는 산악회에선 십 여년을 늘 산행 후 시산제를 지내곤 했는데

날씨가 꾸물대 그런지 오늘 이곳으로 온 팀은 모두가 산행전 시산제를 거행, 처음보는 모습이다

 

산신제 지낸 후 산행 들머리 둔리로 이동. 벌판 가운데 있는 이곳에서도 대구에서 온 팀이 시산제를 거행하고 있다.

 

산행 들머리 둔리.

 

산 정상에 군 시설이 있는 가야산이 멀리 보인다.

 

 

마을 입구를 지나 언덕으로.

 

산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땅 속은 얼어 있고 표면만 녹아 비탈면은 미끄럽다.

 

고도를 높히며 계속 오르막.

 

 

가야산을 줌으로 당겨 보았다. 반대편 방향으로 비슷한 거리에 용봉산이 위치한다. 

가야산 산행은 몇 번 있었으나 정상에 군 시설이 있어 주로 석문봉까지 오르곤 했었다.    

 

갸야산을 배경으로.

 

 

 

정상부근 높이 등산로엔 아직 얼음이 녹지못하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덕숭산 남쪽 둔리 저수지 방향. 오른쪽으로 수암산이 용봉산으로 이어지나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둔리 저수지 배경으로.

 

 

미끄러운 진흙과 낙엽, 바위와 얼음을 피해 조심조심 딛고 정상 도착.

 

2년만에 다시 찾은 덕숭산.

 

주차장에서 다른팀 버스를 많이 보았듯 코스를 달리하여 올라온 정상에도 많은 팀들이 와 있다.

우리팀도 간단하게 간식 즐긴 후 하산시작.  하산 후 식당에서 식사 예정이라 도시락은 준비하지 않는다.

 

덕숭산 남쪽으로 수덕사와 주차장이 보인다.  수덕사는 중3 때 처음으로 수학여행 왔던 곳이다.

사진 왼쪽 위 가운데 능선 봉우리가 수암산으로 보이고, 그 뒤로 제일 높이 흐릿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용봉산 이다.  

 

 

 

 

정혜사(능인선원)

 

만공탑(萬空塔,충남 문화재자료 제181호) 은 만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서

구형(球形)의 돌이 올려져 있는 특이한 부도이다.

 

 

석문 앞에서.

 

 

 

수덕사에서 정혜사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만공이 건립한 25척의 석불로서 머리에 이중의 갓을 쓰고 있는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

 

1924년 만공스님께서 조성 봉안한 관세음보살입상.

모든 중생의 8가지 고통을 덜어 주시는 감로수 병을 손에 드시고,

머리에는 어머님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이마에는 어머님의 상호를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입상 옆에 있는 샘물과 향운각.

 

초가지붕의 소림초당은 1920년대 만공스님을 위해 벽초스님이 지어주신 초당이라고 한다. 만공스님은 이곳에서 수행정진을 했다.

 

사면 석불(四面 石佛)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존불 등의 사면석불.

 

 

 

수덕사 도착.

수덕사를 알게 된것은 중3 때 수학여행지였고,  6년 뒤인 1966년 송춘희가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을 불러 더 유명해 졌다.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  국보 제 49호(충남 예산군 덕산면)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30대 왕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高宗) 2년(1865)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은 고려시대에 유행된 주심포 양식이고 정면 3칸,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바른 돌쌓기 형식의 기단에 사각형의 자연석(自然石)으로 기둥 놓을 자리를 북돋게 조각한 추줏돌을 놓았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각 칸에는 섬세한 빗살 3분 합문이 있고, 측면에는 맨 앞쪽에 출입문을 설치 하였다.

뒤면에는 각 칸에 문을 장식하고 있지만 중앙 칸에만 문을 달았다.  

외부에 노출된 가구(架構)는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난 점으로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중앙의 석가(釋迦)모니불을 중심으로 , 아미타(阿彌陀), 약사(藥師), 삼존불을 모신 이 대웅전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墨書)의 내용으로 보아 1308년충렬왕 34년)에 건립 되었다.  

이 목조삼세불좌상(보물 제1381호)은 만공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노사나불괘불탱은 1673년(현종 14)에 제작된 괘불로서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나타낸 독특한 형식의 그림이다.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공간을 오색의 광선으로 처리하여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안동 봉정사(鳳停寺) 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15))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18)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1971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고,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된 목조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8호이다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은 90년대 초에 다녀왔다)

 

수덕사 3층석탑(修德寺 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 103호)

 

 

 

 

대웅전 양 옆에는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03)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 문화재로는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1263),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381),
수덕사칠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181), 수덕사유물(거문고, 충남문화재자료 192), 수덕사 소장 소조불상좌상(충남문화재자료 384) 등이 있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황하정루

 

 

사천왕문

 

금강문.

 

수덕사 일주문 좌측에 있는 수덕여관은 
수묵 담채화로 유명한  고암(顧菴)이응로(李應魯, 1904-1989) 화백 사적지(事蹟地)로 충남 기념물 제103호(1996.11.30 지정)이다.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나혜석을 만나러 드나들다 인연이 되어 1944년 구입하여 6.25 전쟁당시 피난처로 사용하였으며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작품활동을 하였고,
1959년 프랑스로 떠나면서 부인 박귀희 씨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여관으로 운영하던 곳이다.
 

草家지붕인 수덕여관(修德旅館)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수덕사로 소유권이 넘어가 2007년 부터 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을 공개하고 있다.

수덕 여관은 명색이 여관이니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겠지만 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인물 몇 명과는 인연이 깊다. 

 

 ☆ 침입자 / 김일엽  일엽스님(1896.4.26~1971.1.28)


수덕여관 손님, 김일엽 & 나혜석  나혜석 화가(1896~1948, 일엽스님과 동갑).

 

  이응로 화백(1904~1989)과 전처 박귀희 여사( ~20001.2.23) 


 비운의 김일엽 스님 아들 일당 스님 일당스님(1922~2014, 일엽스님 외아들, 김태신)

 

박인경 여사(이응로 화백 둘째 부인, 대전 이응로 화백 미술관 명예관장) 등이 있다.

 

나혜석, 이응로, 김태신 등을  수덕여관으로 오게 한 이는 일엽(一葉)스님 이다. 

이 여섯 분이 엮여진 이야기는 재미? 있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 이곳에 다 옮기기엔 지면이 좁다. 

 

정면 5칸이 길에 접해 있으며 반대편으로 각각 6.5칸과 4칸이 ㄷ자형 날개를 이룬다.
여관 전면에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두었는데 이 문을 중심으로 좌우 입면이 다르다.
한쪽은 방 앞쪽으로 바닥이 높은 베란다를 설치하였고, 반대쪽은 베란다 없이 유리창문을 달아두었다.

 

감로당.

 

 

 

수덕여관은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일손이 부족한 탓일까? 가을 걷이 끝낸 후 바로 얹어야 할 초가지붕은 볏짚으로 이엉을 잔뜩 엮어놓고도 아직 처마밑에 쌓여 있다.  

 

고암 이응로 선생이 쓰시던 방과 이응로 가 새겨놓은 암각 글씨(수덕여관)

 

1996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

이응로 화백은 1967년 독일에서 간첩사건의 배후로 곤욕을 치루게 되는데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이다.
대학교수, 작곡가 윤이상 등 194명이 옛 동독의 베를린인 동백림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였다며 처벌 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 사건으로 대전 교도소에 수감되어 2년 여의 옥고를 치르고 수덕여관으로 풀려 나온 이응로 화백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요양하며 삼라만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개인이나 사회의 성하고 쇠함이 서로 뒤
바뀌는 현상)를 큰 바위에다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여관 북쪽 귀퉁이에 남아 있는 암각화다.

 

 

선미술관

 

 

수덕사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수덕사(修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충남 일원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백제말에 숭제법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문화재로는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수덕사대웅전(국보 49)과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修德寺盧舍那佛掛佛幀:보물 1263)이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 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 청련당(靑蓮堂), 염화실(拈花室), 조인정사(祖印精舍), 무이당(無二堂), 심우당(尋牛堂),

황하정루(黃河精樓), 천왕문, 금강문, 일주문(一柱門), 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래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으며,
1936년 대웅전 중수 때 발견된 벽화는 건립 당시의 것으로서 주악공양비천도(奏樂供養飛天圖), 수화도(水花圖),

야화도(野花圖), 금룡도(金龍圖), 오선도(五仙圖)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까래에 희미하게 금룡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절의 산내암자로는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하여 견성암(見性庵), 금선대(金仙臺), 환희대(歡喜臺)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의 말사는 66개이다.

이 가운데 정혜사에는 비구 선원인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으며, 견성암에는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다.
또 금선대에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으며, 진영각 안에는 만공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가 죽은 곳이며, 견성암 또한 김일엽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밖에 이 절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노사나불괘불탱(蘆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263호),
만공탑(滿空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칠층석탑(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81호),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된 거문고(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92호) 등이 있다.

 

조인정사 앞에 세워진 칠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탑으로서
지대석 위에 기단 면석 외부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면석에는 두께 10㎝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옥신은 없는데, 그 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옥개석을 받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는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이 거문고에는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 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수덕사는 한국 불교를 해외에 알리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숭산(崇山, 1927∼2004)이 1949년 고봉(古峰)에게 비구계를 받은 사찰이기도 하다.

 

 

 

 

 

하산 후 현지 식당에서 푸짐하고 맛있는 음식 나누고 귀가행 버스에 오른다.

 

오늘도 걸을 수 있음에 행복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