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애경사 단상

opal* 2024. 2. 11. 12:32



'240211(일) 오전, 애경사 단상(斷想)

노인 내외 둘이 늦은 아침 먹고 있는 중인데 벨이 울려 받으니 작은 아들,
"아직 빈소도 준비 안됐는데 누나가 온다고 전화가 왔네?"
"으응 누나? 여기서 형과 만나 넷이 같이 간다고 한 시간 전에 이미 출발했어."
"그래요? 오후 한 두시가 되어야 준비가 가능하다고 해서 부고장도 아직 못 보냈는데?"
"그런데 장례식장은 어디야?"
"전에 우리 같이 갔었던 △△ △△ 근처에 있는 ㅇㅇ ㅇㅇㅇ 이에요."
"그렇구나, 우리 포함 네 집 사돈 어른들이 다 생존해 계신데 가장 젊으신 막내네 사돈께서 젤 먼저 돌아가시니 아들 노릇 할 동생이 걱정되어 형이 젤 먼저 달려 가는 거지. 경사보다 애사엔 형제들 밖에 더 있겠니?"

평일에 이어진 주말도 아니고 설 명절 연휴이니 누구나 모두들 제각각의 스케쥴로 바쁜날, 안타까워하는 부모를 대신해서 먼저 달려가 주는 애들이 대견하다.
아직은 형제들이 도와줄 수 있는 세대지만 손주 세대는 외아들이나 고명딸 하나씩만 있으니 앞으로는 '사촌'이나 '조카' '이모' 고모' 라는 명칭도 없어지게 생겼다.

지금은 결혼식도 장례식도 건물을 따로 마련해 예식을 거행하고 있지만 내 어린 시절엔 애경사를 모두 집에서 치루어야 했었다.  
결혼식도 집에서 치루느라 하나 뿐인 고모 시집 갈 때 새신랑 맞이하며 사람들이 삼태기에 재를 담아 사모관대 쓴 고모부가 되실 새신랑에게 뿌렸던 일이 생각난다. 깨끗한 재를 뿌리는 것은 액을 쫓는 풍습 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72년 전 일 이다.  
손님도 단체 별로 불러 대접 하느라 사 나흘간 잔치를 했다.  
그 고모님은 현재 95세로 허리는 굽었지만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다.

장례식도 집에서 치루느라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며칠 씩 밤새우며 손님 치루느라 사랑방에 쌓아 놓았던 쌀가마니 중 일곱 가마니가 사 나흘 간 없어지는 걸 보고 엄청 놀라기도 했었다.
"새 중에 가장 무서운 새가 먹새" 라던 엄마의 말씀, 사람들의 먹세가 그만큼 무서웠던 61년 전 일 이다.

형제 자매가 없는 손주들이 어른이 된 시대의 애경사 문화는 또 어떻게 변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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