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의 '매미'(태풍 이름) 만큼이나 큰, 중심기압 970hpa의 '나비'가 온단다.
05:30. 차에 오르니 예보 때문일까? 빈자리가 드문드문 눈에 띈다.
07:20. 충주 휴게소. 큰 여치를 닮은 녹색 곤충이 거울에도, 바닥에도, 화장실문에도 수없이 많으니 징그워 보인다.
08:30. 은티 마을 도착. 마을길을 지나 사과밭 사잇길을 지나려니 2주 전보다 훨씬 잘 익은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예쁜 사과를 보니 두 볼이 발그레해 ‘사과’란 별명을 들었던 학창시절 생각이 난다.
참깨 꽃을 찍었던 밭이나 붉게 잘 익은 수수밭도, 고추밭도 수확 날 만을 기다리는데
메밀꽃 만이 아직 하얗게 여유 있게 피어있다. 봉평 못지않게 보인다.
09:15. 봉암사에서 울타리를 세워놓은 지름티재에 올라서니 이제야 바람이 분다. 길 따라 10여 분을 걷다
포개진 커다란 바위덩이 사이로 기어 지나가니 길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불확실하고, 가파른 오르막인데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오르다 보니 절벽 오르막 위에서 대장님이 로프를 내려 준다.
오늘의 산행 코스는 원래 백화산을 지나 이화령이 하산 지점인데, 이곳의 등산로가 험준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길이가 길어 두 번에 나누어 산행하기로 한다.
10:10. 나무뿌리 잡고, 밧줄 잡고 죽기 살기로 능선에 오르니 조금 앞쪽에서 우리 일행과 스님 세분이 얘기를 하고 있어,
못 가게 막는 것일까? 하며 조용히 다가서니 다른 얘기중 이라기에 휴~ 하며 지나친다.
생기를 되찾는 산죽나무 길을 따라 내려서며 부지런히 걸으니 바위에 이끼가 낀 옛 성터가 있다.
10:30. 871봉에 올라선 일행이 지도를 보더니 희양산을 지나쳤다고 한다. 이걸 어쩌면 좋아?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희양산인데...
백화산까지 간다면 몰라도. 희양산은 원래 대간 길에 있지 않아 일부러가야 한다기에 처음부터 선두따라 나섰던 것이다.
뒤돌아서서 다시 오던 길을 걸으니 내려설 때 편하던 산죽나무 길이 오르막이 되어 힘이 든다. 차라리 뒤에 왔으면
이 고생은 안하고 희양산으로 직접 갔을텐데... 이게 무슨꼴이며 언제 다시 이곳까지 온담? 한 시간은 족히 걸릴텐데...
10:50. 희양산(908m) 정상엔 그 흔한 표지석도 없이 돌무더기만 조금 쌓아 놓았다. 구왕봉에서 볼 땐 바위도 많더니...
멋진 바위들과 소나무, 시퍼렇게 보이는 산세와 전망이 절경이다. 큰 바위 아래로 멀리 호젓하게 봉암사도 보인다.
희양산을 못다니게 막는 이유를 알겠다. 산꼭대기에서 소리지르면 도량에 들리겠다. 조계종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11:30. 하얀 물봉선과 야생화들이 많은 고개에 내려섰다가 봉우리를 다시 오른다. 뾰족하게 조각난 돌길,
가파른 능선에서 부는 바람이 모자 속까지 시원하다. 작은 골짜기 옆으로 평지 같은 곳에 돌이 많이 섞인 오솔길로
오르려니 대간 길 같지가 않다. 후미대장까지 모두 가버린 산 속에 일행 한분이 기다려주며 함께 걸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멀리 능선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커다란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만큼이나 크게 들린다.
12:00. 억새풀이 넓게 자리 잡고 있는 배넘이 평전. 날씨도 흐리고 태풍급 바람으로 시원해 땀이 덜나니 물은 그대로 있다.
갈 길은 바쁘지만 속이 출출해 과일 간식시간을 갖는다. 좌측으로 시루봉 가는 길이 있지만 이젠 대간 길만 걸어야 한다.
이만봉으로 가는 길목의 바람이 넓은 활엽수 잎을 모두 뒤집어 놓으며 무서운 소리로 불어대니 온 산이 날아갈 것 같다.
'바람까지는 좋은데... 나비(태풍이름)야 제발 많은 비는 몰고 오지 말아 주렴...'
12:25. 이만봉 119구조 8지점을 통과해 능선에 오르니 바람이 엄청 세다. 노송과 거목들이 흔들리니 온 산이 흔들리는 듯하다.
봄엔 아름다운 길일 것 같은 능선 길 옆의 산철쭉 잎들이 바람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구절초와 쑥 부쟁이 이름 모르는 많은 야생화들이 오늘은 바람에 흔들려 사진 찍기가 힘들다.
12:45. 부지런히 따라가 후미 팀과 함께 밥을 먹고 나니 춥다. 어느새 춥다며 찬 커피가 싫단다.
13:10. 이만봉정상(990m).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날카로운 바위 능선 내리막 길을 내려딛는다.
119구조 5지점을 지나 곰틀봉을 향하는 능선 길에 우측으로 보면 봉암사쪽으로 들어오는 마을이,
앞쪽엔 다음에 산행할 백화산이, 좌측으론 웅장한 몇 겹의 산줄기들이 시퍼렇게 눈에 들어오는데 방향으로 봐서는
다음에 우리가 걸어야 할 대간 길에 있는 산 같기도 한데 바위산이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13:35. 곰틀봉(950m)도착. 오늘 산행 중 마지막 봉우리. 백화산을 멀리서만 바라보며 그대로 내려 딛는다.
14:00. 분지리로 내려가는 사다리재 도착. 오늘의 대간 길은 여기서 안녕하고 가파른 너덜지대의 하산 길을 내려딛는다.
다래나무 같은 덩굴식물들이 얽히고 설킨 원시림 같은 숲과, 바위의 이끼가 파란걸 보니 습기가 많겠구나 하며 내려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물봉선이 먼저 눈에 띈다. 집 근처 개화산에서 샘물 옆에 군락을 이루는 걸 작년 여름에 발견하고부터
습지 식물임을 알게 되었는데 올 여름에 일부러 가보니 누군가가 다 없애고 야채를 심어놔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모른다.
너덜지대인 이 길을 다음에 오르려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며 내려서니 이번엔 잔돌 섞인 가파른 내리막 이다.
길옆엔 야생화들이 더 많다. 아름드리 신갈나무 숲엔 활엽인데도 불구하고 태풍은 커녕 바람 소리조차 없다.
14:30. 조금 더 내려서니 낙엽송 숲길이라 아주 부드러워 걷기에 편하다.
14:45. 졸졸 흐르는 게곡 물에 손을 닦고 내려서니 물봉선 천국이다. 처음 보는 노랑 물봉선도 있고 당귀꽃도 있고,
여러 가지 꽃들이 잔뜩 있으니 발걸음이 멈춰진다. 꽃이 오래오래 피어 있도록 날씨가 춥지 말았으면 좋겠다.
15:00. 나무는 보았으되 열매를 처음 보는 제피나무 아래서 동네 아낙들이 빨갛게 익은 산초열매를 훓고 있어 좋은 향내가 난다.
15:15. 차가 기다리는 안말에 도착하니 예전에 많이 보던 백일홍, 다리아, 봉숭아, 과꽃.. 들이 예쁜 모습으로 반긴다.
산행 소요시간 6시간 반.
마을 어귀에도 산기슭에도 계곡 물 옆에도 물봉선을 포함한 여러 가지 꽃들과 오래된 제피나무가 많은걸 보니
환경에 알맞은 대로 살아가는 식물들이 행복해 보인다. 아름다운 그 모습 그대로 오래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15:30. 따끈따끈한 해물전과 포도주 한잔으로 하산을 마무리하고 차에 오른다.
2005. 9. 6.(火). 백두대간 종주 22-1구간을 오르다.
(은티마을-지름티재~희양산~배넘이 평전~이만봉~곰틀봉~사다리재-안말.)
'백두대간 종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19회(2구간, 성삼재~노고단~돼지령~임걸령~노루목~삼도봉~화개재) (0) | 2005.09.24 |
---|---|
백두대간 18회(22-2구간, 사다리재~평전치~백화산~조봉~이화령) (0) | 2005.09.20 |
백두대간 16회 무박산행(1-3구간, 세석 대피소~영신봉~덕평~토끼봉~화개재) (0) | 2005.08.27 |
백두대간 15회(21구간.버리미기재~ 장성봉~구왕봉~지름티재-은티마을) (0) | 2005.08.16 |
백두대간 14회(20-2구간.밀재~대야산~촛대봉~버리미기재를 逆順으로) (0) | 2005.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