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시 100편-제12편] 박 용래- 저녁눈 저녁눈 박 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일러스트=잠산 박용래(1925~1980) 시인은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는 우리.. 詩와 글 2008.07.05
[애송시 100편-제11편] 최 승호- 대설주의보 대설 주의보 최 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詩와 글 2008.06.29
[애송시 100편 - 제10편] 노 천명- 사슴 사 슴 노 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1938년> ▲ 일러스트=잠산 노천명(1911~1957) 시.. 詩와 글 2008.06.28
이 기철-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구름에서 내려오다, 숲은 별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이 기철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 詩와 글 2008.06.27
[애송시 100편- 제9편] 오 규원- 한 잎의 여자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 詩와 글 2008.06.20
[애송시 100편 - 제8편] 김 종삼- 묵화 묵화 김 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 ▲ 일러스트=잠산 김종삼(1921~1984) 시인의 시는 짧다. 짧고 군살이 없다. 그의 시는 여백을 충분히 사용해 언어가 잔상을 갖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다. .. 詩와 글 2008.06.15
[애송시 100편 - 제7편] 곽 재구- 사평역에서 사평역(沙平驛)에서 곽 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를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詩와 글 2008.06.14
[애송시 100편 - 제6편] 서 정주- 동천 冬天 서 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일러스트=잠산 겨울 밤하늘을 올려 본다. 얼음에 맨살이 달라붙듯 차갑고 이빨은 시리다. 문득 궁금해진다. 미당(未堂) 서정.. 詩와 글 2008.06.13
이 해인 - 유월의 장미, 유월엔 내가, 잎사귀 명상, 잘못된 관계. 六月엔 내가 이 해인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六月 六月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 없는 山香氣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生命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六月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山기슭에 엎디어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 詩와 글 2008.06.11
[애송시 100편 - 제5편] 김 춘수- 꽃 ▲ 일러스트=권신아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 '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 詩와 글 2008.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