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446

양광모 /가장 넓은 길

가장 넓은 길 양광모 살다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이 덮었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마음 속에 있다 푸른길 2023 ('231116 수능 날 사용된 2024 수능 필적 학인 문구)

詩와 글 2023.11.19

신달자 / 가을 들, 꽃

가을 들 신달자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 다시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극도로 예민해진 저 종이 한 장의 고요 바람도 다소곳하게 앞섶 여미며 난다 실상은 천년 안내의 깊이로 너그러운 품 넓은 가슴 나는(飛) 것의 오만이 어쩌다 새 똥을 지리고 가면 먹물인가 종이는 습자지처럼 쏘옥 빨아 들인다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다 받아 주는데도 단 한 발자국이 어려워 입 닫고 조용히 지나가려다 멈칫 서 떨고 있는 초승달 꽃 신달자 네 그림자를 밟는 거리쯤에서 오래 너를 바라고보 싶다. 팔을 들어 네 속닢께 손이 닿는 그 거리쯤에 오래오래 서 있으면 거리도 없이 너는 내 마음에 와닿아 아직 터지지 않는 꽃망울 하나 무량하게 피어올라 나는 네앞에서 발이 붙었다

詩와 글 2023.09.19

9월의 시 몇 수

9월 첫날의 시 정연복 어제까지 일렁이는 초록물결인 줄만 알았는데 오늘은 누런 잎들이 간간히 눈에 뛴다. 쉼없이 흐르는 세월의 강물따라 늘 그렇듯 단 하루가 지나갔을 뿐인데 하룻밤 새 성큼 가을을 데리고 온 9월의 신비한 힘이 문득 느껴진다, 9월이 오면 안 도 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을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

詩와 글 2023.09.01

6월의 시 모음

6월 오세영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 눈먼 나는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막힐 듯, 숨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6월의 달력 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

詩와 글 2023.06.02

유월의 아침, 유월에 꿈꾸는 사랑

유월의 첫날 아침 김덕성 항시 고운 얼굴로 말없이 미소로 다가오는 사랑 분배 하듯 고루고루 나누는 그 솜씨는 아름답다 화냄도 투정도 없이 원천이 되는 생명의 빛으로 늘 뜨겁게 베풀어 주는 그 사랑의 마음 어둠 물리 친 햇살 빈 마음에 채워 생기 되찾아 내 영혼 맑게 빛나며 삶의 샘이 솟는다 희로애락의 세상 날마다 감사를 경험하면서 햇살 받으며 하늘로 나래 펴는 상쾌한 유월 아침이어라 6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6월 같은 사람들이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

詩와 글 2023.06.01

오광수 / 5월을 드립니다

5월을 드립니다 오광수 당신 가슴에 빨간 장미가 만발한 5월을 드립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생길 겁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자꾸 듭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많이 생겨나서 예쁘고 고른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얼굴 가득히 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당신 모습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기분이 자꾸 듭니다 ​당신 가슴에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5월을 가득 드립니다

詩와 글 2023.05.13

마음 속의 온도는 몇 도 일까요?

마음 속에 꽉 찬 압박감으로 새로운 약속 하나 잡을 수 없는, 그래서 겨우 몸뚱이 하나만 느긋한 주말 아침. 무심코 누르다 걸려든 영상 하나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모습 몸은 어려도 마음은 이미 다 성숙한 어른 같은 한 아이의 작품이 유난히 와 닿는다. 2015년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 받은 13살, 싻수가 파릇파릇한 어린이의 문장력이 깊은 감동을 준다.

詩와 글 2023.04.30

가을 저녁 / 이동순​

가을 저녁 이동순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길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녔습니다 그대에게 전화를 걸어도 신호만 갑니다 이런 날 저녁에 그대는 무얼 하고 계신지요 혹시 자기 자신을 잃고 바람 찬 거리를 터벅터벅 지향 없이 걸어가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이 며칠 사이 유난히 수척해진 그대가 걱정스럽습니다 스산한 가을 저녁이 아무리 쓸쓸해도 이런 스산함쯤이야 아랑곳조차 하지 않는 그대를 믿습니다 그대의 꿋꿋함을 나는 믿습니다. 『그대가 별이라면』(시선사, 2004)

詩와 글 2022.11.12

나태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주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 것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이유이다. 외로움 나태주 맑은 날은 먼 곳이 잘 보이고 흐린 날은 기적소리가 잘 들렸다 하지만 나는 어떤 날에도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 나태주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

詩와 글 2022.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