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448

가을 저녁 / 이동순​

가을 저녁 이동순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길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녔습니다 그대에게 전화를 걸어도 신호만 갑니다 이런 날 저녁에 그대는 무얼 하고 계신지요 혹시 자기 자신을 잃고 바람 찬 거리를 터벅터벅 지향 없이 걸어가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이 며칠 사이 유난히 수척해진 그대가 걱정스럽습니다 스산한 가을 저녁이 아무리 쓸쓸해도 이런 스산함쯤이야 아랑곳조차 하지 않는 그대를 믿습니다 그대의 꿋꿋함을 나는 믿습니다. 『그대가 별이라면』(시선사, 2004)

詩와 글 2022.11.12

나태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주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 것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이유이다. 외로움 나태주 맑은 날은 먼 곳이 잘 보이고 흐린 날은 기적소리가 잘 들렸다 하지만 나는 어떤 날에도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 나태주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

詩와 글 2022.11.04

11월의 시 모음

11월의 시 임영준 모두 떠나는가 텅 빈 하늘아래 추레한 인내만이 선을 긋고 있는데 훌훌 털고 사라지는가 아직도 못다 지핀 詩들이 수두룩한데 가랑잎더미에 시름을 떠넘기고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11월의 시 이재곤 맺히고, 익어서 지닐 수 없을때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다시, 또 다시 살아도 지금같을 삶이 슬퍼서 그때도 지금 같이 울리라 눈에 들여도 가슴에 들여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한 토막 슬퍼서 너무슬퍼서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십일월 이정림 ​바람에 낙엽이 흩어지고 또 날린다. 찌푸린 하늘은 할미꽃 떨어져 날리는 잎사귀마냥 모두들 바쁘다. 푸시시한 얼굴에 초겨울 그림자가 스치고 쪼달림의 모습 모습이다. 잘 익은 밤나무 밤톨 한 알 없이 다 털리고 주황색 감나무에 달..

詩와 글 2022.11.01

류근 /가을이 왔다

가을이 왔다 류근 가을이 왔다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왔다 하루는 내가 지붕 위에서 아직 붉게 달아오른 대못을 박고 있을 때 길 건너 은행나무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몇 잎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길에 오르고 아직 바람에 들지못한 열매들은 지구에 집중된 중력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주의 가을이 지상에 다 모였으므로 내 흩어진 잔뼈들도 홀연 귀가를 생각했을까 문을 열고 저녁을 바라보면 갑자기 불안해져서 어느 등불 아래로든 호명되고 싶었다 이마가 붉어진 여자를 한번 바라보고 어떤 언어도 베풀지 않는 것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뜻 안경을 벗고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는 일이 그런데로 스스로에게 납득이 된다는 뜻 나는 식탁에서 검은 옛날의 소설을 다 읽고 또 옛날의 사람을 생각하고 오늘의 불안과..

詩와 글 2022.10.31

김춘수 / 가을 저녁의 시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15일 오후 카카오 데이터 화재 이후 사용할 수 없었던 티스토리, 오늘(18일) 저녁에서야 비로서 컴퓨터에서 진행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오늘 보내온 하얀 천일홍과 붉은 댑싸리

詩와 글 2022.10.18

노을, 아름다운 저녁, 가을 저녁,

노을 ​ 나태주​ 저녁 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 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노을 최윤경​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를 곱게 물들이는 일 세월과 함께 그윽하게 익어가는 일 동그마니 다듬어진 시간의 조약돌 뜨겁게 굴려보는 일 모지라진 꿈들 잉걸로 엮어 꽃씨 불씨 타오르도록 나를 온통 피우는 일 ​ *잉걸=불잉걸 : 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덩이 아름다운 저녁 이성선​ 장마로 오랫동안 가려졌던 산이 터진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살결을 드러낸다 보아서는 안될 속가슴과 가랭이 사이 여인의 옷 벗는 모습을 숨어서 보는 ​눈물나게 아름다운 저녁이다 『산시 山詩』(시와시학사, 1999)

詩와 글 2022.09.25

고흥, 거문도 여행 중 만난 꽃과 시

오늘 동행인이 전에 대마도 여행 때 같이 갔던 일행이기에 이 꽃(당아욱) "대마도 여행 첫날(2013.6.10) 수선사 앞에서 처음 보았다"고 했더니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 한다. ▼ 거문도에서 등대 따라 가는 길 최원준 등대 따라 가는 길... 바다를 가없이 비추인다는 것 비추어 길을 내어주고 이끌어 준다는 것 참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일이다 하여 그 길 따라 간다는 것은 안온하면서도 기꺼운 일 어미의 자궁 찾아 가는 길과 다름 아니다 해서 배들은 바닷길 따라 제 길을 내고 등대는 늦은 귀항의 배들을 기다린다 하루 종일 자궁 속처럼 드나드는 자식을 품어 주는 것 그래서 바다를 ‘희망의 도가니’ 로 만드는 것... 등대 따라 가는 길이다 그 길 김민휴 내 생애 딱 한 번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숨긴 ..

詩와 글 2022.06.06

김사인 - 공부

공부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끓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시집 창비. 2015

詩와 글 2022.04.15

'22 입춘(立春)

봄(春)이 들어선다는 '입춘(立春)'은 24절기 중 첫번째 절기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다. 24절기는 기본적으로 태양의 궤도인 황도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지므로 양력 날짜에 연동된다. 입춘은 태양의 황경이 315°인 날로 대개 2월 4일이나 5일이다. 입추로부터 꼭 반년째 되는 날이며,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서 문에 붙여 집집마다 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했다. 입춘단상 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 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 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1992년, 창비 희망, 그 입춘 사이 곽진구 겨울 내내 낡은 양철지붕은 펑펑..

詩와 글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