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446

겨울사랑, 겨울나무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 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되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 사랑 고정희 그 한..

詩와 글 2022.01.11

겨울 강 /정호승, 오탁번, 박시교

겨울 강에서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겨울 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1979) 겨울강 정호승 ​ 꽝꽝 언 겨울강이 왜 밤마다 쩡쩡 울음소리를 내는지 너희는 아느냐 ​ 별들도 잠들지 못하고 왜 끝내는 겨울강을 따라 울고야 마는지 겨울강 오 탁번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쏠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 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

詩와 글 2022.01.11

걸어서 돌아왔지요/ 윤제림

걸어서 돌아 왔지요. 네거리에서 윤제림 길을 나설 구실을 만듭니다. 편지 한 통 부칠 일이 생기면 기쁘게 우체국에 갑니다. 부조금으로 쓸 현금을 찾으러 즐거이 은행 지점엘 갑니다. 일터에도 현금 지급기가 있지만 구태여 그곳까지 갑니다. 책 한 권 사러 삼십 분쯤 떨어진 책방에 갑니다. 혼자 점심을 먹게 되는 날은 휘파람을 불며 기사식당에 갑니다. 파주 장단콩으로 두부 요리를 잘하는 집이 있어 왕복 한 시간을 걷기도 합니다. 퇴근이 늦어지는 날 저녁이면 라면이나 우동 한 그릇을 먹으러 뒷산 언덕을 팔자걸음으로 넘어 갑니다. 지우개 하나를 사려고 골목길을 한참 걸어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가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갑자기 '말굽자석'이 생각나서 주변 초등학교 앞을 죄다 뒤지고 다녔습니다. 생각의 숙제 하나를 ..

詩와 글 2022.01.04

축시(祝詩)/ 류근

축시(祝詩) ​ 류근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

詩와 글 2021.12.29

새들은 생각과 실현의 간격이 짧다 / 김용택

새들은 생각과 실현의 간격이 짧다 김용택 박새가 날아와 돌담에 붙어 있다가 금방 난다 딱새가 날아와 죽은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있다가 금방 난다 새들은 생각과 실현의 간격이 짧다 왜가리만 몇 시간을 제 자리에서 외발로 서서 먹이를 노린다. 인내의 긴장이 길어도 겨울 강에서는 그 결과가 허망할 때가 많다. 자본의 가치가 가장 앞에 있는 세상에서 긴 사색과 회의가 대부분의 일을 그르친다. 새를 따라가다보면 하늘이 멀리 열린다. 바람은 불고 햇살은 모자라거나 남지 않는 정확한 그림자를 준다. 산은 가만히 있고 강물은 가져간 것들을 돌려주지 않는다. 강물은 돌아올 길이 없어 무정하다. 어느 때부터였는지 나는 단순해져갔다. 단순은 단박에 되지 않는다. 공간이 시간을 버린다. 어느 지점에서인지 짧은 숨을 내뱉고 다..

詩와 글 2021.12.29

겸손 / 이동규

'겸손은 머리의 각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다' (교보 글판 겨울편) 겉치레가 아닌 진정성을 갖고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자는 의미 이다. 글판 디자인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따뜻한 일러스트로 표현. 이동규(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의 칼럼 '겸손'에서 발췌. 이동규 교수는 두 줄의 짧은 문장으로 긴 울림을 주는 저서 '두 줄 칼럼'으로 잘 알려진 경영평가 전문가다. 달변의 한계 * 말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잘 말하는 게 중요하다. * 얼굴은 얼(soul)의 꼴이다 얼을 닦으면 얼굴에 빛이 난다 * 하수는 집착하고 고수는 버린다 선택은 고난도의 포기행위다 *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사랑은 최고의 복수니까요 * 인생 함수(f)= Attitude×Capability 하나가 0이면 전..

詩와 글 2021.12.22

낙엽(落葉) / 레미 드 구르몽

▲추워진 날씨에 얼음이 언 곳이 있는가 하면 푸른잎 키 작은 애들도 보인다. 야산에서의 푸른잎은 더 반갑고 신기할 정도. ▼ Les feuilles mortes Rémy de Gourmont Simone, allons au bois : les feuilles sont tombées ; Elles recouvrent la mousse, les pierres et les sentiers.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Elles ont des couleurs si douces, des tons si graves, Elles sont sur la terre de si frêles épaves ! Simone, aimes-tu le b..

詩와 글 2021.12.05

가을비

가을비 도종환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던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

詩와 글 2021.11.08

시월의 시 모음, 피천득 外 29人

시월 피천득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시월 목필균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에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시월 이기철 잘 익었는지 하나만 맛보고 가려다가 온 들판 다 엎질러 놓고 가는 볕살 베짱이 귀뚜라미가 나도 좀 데려가 달라고 악다구니 쓰는 시월 시월 이시영 나비가 지나간 하늘 한복판이 북처럼 길게 찢겨졌다 그곳으로 구름 송이들이 송사리처럼 모여들어 엉덩방아들을 찧느라고 가을 한 자락이 오후 내내 눈부시다 시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장조차 보여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

詩와 글 2021.10.01

추분(秋分), 시와 산책

추분(秋分) 나유성 오랜만에 당신이 아름답게 보이는 걸 보니 몹시 외로운가 봅니다 저울에 당신을 향한 마음을 얹어보니 사랑과 미움이 수평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마음은 한 쪽으로 기울어지겠지요 추분 날에 海風 오태수 백로와 한로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 않고 오로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중심 꼭 잡고 있으니 갈 것은 떠나가고 올 것은 돌아오고 숨을 것은 숨으니 소슬바람 불어오고 가을이 영글어가는 오늘이네 낮과 밤의 길이가 서로 똑같은 날이라 하니 너와 나의 사랑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늘 오늘 같은 날만 되고 쉬 식지 않은 열망 불타고 늘 그리움 쉬 저버리지 않은 애틋한 마음 맺히길 하얀 이슬이 빛나는 아침이면 밤새도록 서성이며 남기고 간 너를 가만가만 되 집듯이 떠올려 본..

詩와 글 2021.09.23